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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과 탈속 그리고 세 개의 시선 ; 유창창, 전현선, 최선 

 

 김노암

 

세속과 탈속 사이에서

모든 것이 세속화되는 시대이다. 이런 시대에 예술은, 회화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회화의 본질적인 문제를 함께 나눌 수 있는 ‘회화’란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고 어떤 회화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그것에 대해 대화를 나눠야 하는가? 

예술이 특정 개인이나 계급, 또는 특정 국가나 이념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예술은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세속화와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며 이상적인 균형을 잡으려는 힘이다. 이러한 활동은 존재의 내부로 깊이 또는 외부로 높이 시선을 던진다. 사람들은 예술을 통해 현실의 한계와 제약을 벗어나거나 현재보다 더 높은 차원으로 초월하려 한다. 예술은 표현과 형식이 역동하며 교차하는 세계이다. 그것을 통해 고도로 초월적인 영역과 가장 일상적인 생활과 현실의 문제를 결합하려 한다. 예술은 현실감각과 생동감을 잃지 않고 인간의 보편적 문제를 다루는 가장 탁월한 도구이다. 세속(世俗)과 탈속(脫俗) 사이에서 무수한 실패와 오류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완전한 이미지를 표상하려는 사람들의 존재의 방식이다. 한 개인, 한 존재는 결코 계량될 수 없고 우리의 문화에서 객관화의 한계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영역이다. 모든 것이 관리와 예측이 가능해지는 빅데이터화하는 세계, 자본화와 상품화가 영혼의 영역까지 치밀해지는 세계 속에서 예술은 인간의 본질, 삶의 궁극적 의미, 좋은 삶, 충만한 순간을 감각하고 지시하려 한다. 예술가들은 부표처럼 떠다니는 것이 사람의 감정과 마음과 영혼이라면 그것을 하나의 이미지로 표상하려 한다. 

유창창, 전현선, 최선 세 작가의 작업은 각자 자신의 시선과 노선을 따라서 20세기 미술가들이 도전해온 현대 예술의 모험과 조우한다. 미술사적 의미와 형식을 이해하고, 동시에 전통적인 형식의 수용과 변용을 통해 현대 회화의 본질을 재발견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독자적인 미학에 기반하는 개별자의 세계라는 점에서 철저하게 탈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어떻게 철저하게 탈역사적인 세계가 의미심장한 역사적 의미를 획득할 수 있는가?

 

세 개의 시선

한 작가의 창작과정을 유추해보면 창작이란 그것이 공중(公衆)에 알려지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아닌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한마디로 ‘없음’ 또는 ‘무의미’한 것이다. 정신적으로건 또는 신체적으로건 강렬한 에너지가 작동하면서 표출되는 것을 모든 예술가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보편적인 ‘이해’를 넘어서 바로 그 작가 개인의 내면에서 격렬하게 투쟁하며 표현되는 것을 ‘느끼는 것’은 수용자들에게도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요구한다. 

종근당예술지상의 작가들은 우리 앞에 던져지는 여러 의문과 선택의 기로에 서서 같은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보려고 한다. 유창창, 전현선, 최선 작가 3인은 각자의 시선과 관점을 견지하며 이미지를 연출하고 표현하며 하나의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세 작가를 뭉뚱그려 일반화할 수 있는 미적 형식이나 보편성을 찾는 시도는 무의미하다. 혹 어떤 공통점을 직관할 수 있다하더라도 그것이 이들의 작품을 감상하고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요소인 것도 아니다. 작품을 보는 것은 철저하게 개별적이며 특별한 사적 존재와 세계가 만나는 일이다. 우리는 이러한 내밀하며 정교한 과정을 감각하고 경험하고 인식하는 정신의 운동과 조우한다.

제 6회 종근당 예술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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